제2차 야마가타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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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야마가타 내각은 1898년 11월 8일부터 1900년 10월 19일까지 711일 동안 재임한 일본의 내각이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내각총리대신을 맡았으며, 지조 증징, 문관 임용령 개정, 군부 대신 현역 무관제 도입, 중의원 의원 선거법 개정, 부현제 개정, 치안 경찰법 개정,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 제정, 의화단 운동 관련 육군 파병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헌정당과의 관계 변화를 겪으며, 이토 히로부미에게 정권을 넘기고 내각이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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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야마가타 내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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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야마가타 내각 | |
내각 번호 | 9대 |
국가 원수 | 메이지 |
관할 | 일본 |
![]() | |
구성 시점 | 1898년 11월 8일 |
해산 시점 | 1900년 10월 19일 |
정부 수반 직함 | 내각총리대신 |
정부 수반 | 야마가타 아리토모 |
국가 원수 직함 | 천황 |
이전 내각 | 제1차 오쿠마 내각 |
다음 내각 | 제4차 이토 내각 |
임기 | 1898년 8월 ~ 1902년 |
기타 정보 | |
정치적 성향 | 번벌, 관료 내각 |
2. 재직 기간
3. 성립 배경
1898년 헌정당의 분열로 제1차 오쿠마 내각이 총사직하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대명을 받아 자파 번벌 관료를 중심으로 내각을 조직했다. 초기에는 지세 증징을 실현하기 위해 헌정당 자유파와 제휴하여 지세 증징과 일본흥업은행법을 실현시켰다.[1]
하지만 그 후 야마가타는 헌정당과의 입각 약속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문관임용령을 개정하였으며, 이어 문관분한령, 문관징계령, 치안경찰법 제정,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도입 등을 통해 정당을 정부에서 배제하고 초연주의에 의한 국가 운영을 목표로 하였다.[1]
제1차 오쿠마 내각은 이전까지 중의원을 양분하여 각각 당시의 번벌 내각과 대립을 반복해 온 자유당(이타가키 다이스케)과 진보당(오쿠마 시게노부)이 합동하여 헌정당을 결성한 것을 받아, 정권 운영의 가망이 없어진 번벌 정부가 헌정회에 내각을 조직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당내 대립을 제어할 수 없게 되어 당은 분열, 1898년 10월 31일 내각 총사직에 이르렀다.[2]
후임에는 사쓰마와 조슈 양번 중 이 시점에서 우위에 있던 조슈번에서 선임하게 되었고, 이토 히로부미 전 총리는 청나라로 외유 중이었기 때문에, 야마가타 아리토모 전 총리가 11월 5일에 대명 강하를 받았다.[2] 이 시점에서 헌정회는 구 자유당이 당내 쿠데타와 다름없이 헌정회를 해산·재결성한 동명의 정당, 헌정회와, 구 진보당이 대항하여 결성한 헌정본당으로 분열되어 있었다.[2]
야마가타 총리는 의회 대책으로, 제2차 이토 내각에서 연계한 경위가 있던 구 자유당(신·헌정회)과 접근했다. 총리 측근인 가쓰라 육군대신이 의회·정당 대책의 창구가 되어, 헌정당을 주름잡던 호시 료와 교섭했지만, 가쓰라는 이타가키 내무대신·호시 법무대신의 2개 포스트를 제시한 것에 대해 호시는 더 2개 포스트를 요구했기 때문에 교섭은 성사되지 못하고, 정권은 일단은 초연주의(올 야당)로 시작한다.[2]
그 후에도 헌정회와의 정책 협정이 이어져, 11월 28일 각의에서 승인을 얻은 뒤 타협 조건이 제시되었다. 11월 30일, 야마가타 총리는 헌정당 대의원과 다담회를 열어, 헌정당과 "심기일전"의 제휴를 성명했다.[2]
야마가타 내각은 헌정당의 연계를 거쳐 2년 가까이 안정적으로 정권 운영을 했지만, 호시 등이 요구한 헌정당원의 입각, 혹은 각료의 헌정당으로의 입당에 대해서는, 말을 빙빙 돌려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00년 봄 무렵부터, 헌정당은 야마가타 내각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여, 조슈벌의 2대 세력의 맹주인 이토 전 총리에게 접근한다.[2] 이토 전 총리는 오래전부터, 초연주의와의 결별과, 정권 담당 능력이 있는 국정 정당의 필요성을 생각하고 있어, 신당 결성의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에 연계가 성립, 헌정당은 이토 신당에 합류하기로 결정한다.[2]
야마가타 총리는 이 움직임을 받아, 이토 신당이 정권을 잡으면 의회에 기반을 가지지 못한 자신은 이토의 하위 지위에 머무르게 될 것을 우려하여, 앙갚음으로 이토에게 정권을 떠넘기는 것을 선택한다. 이토 신당의 움직임이 본격화된 8월 하순에 총사직을 표명, 후임으로 이토를 추천했다. 그리하여 이토는 조각과 신당 결성을 동시 병행적으로 진행하여, 1900년 9월 15일에 입헌정우회를 결성, 10월 19일에 제4차 이토 내각을 발족시킨다.[2]
4. 주요 정책
헌정당의 분열로 제1차 오쿠마 내각이 총사직하면서 1898년(메이지 31년) 11월 5일에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대명을 받아 자파의 번벌 관료를 중심으로 조각하였다. 제2차 야마가타 내각의 주요 정책은 다음과 같다.
- 지조 증징: 제2차 마쓰카타 내각이 국가 재정상의 필요성으로 증징을 표방한 1897년 이래로 번벌에게는 숙원 사업이었다. 재계는 영업세·소득세 등의 폐지를 위해 지조의 증징을 요구했지만, 의원들 사이에서는 선거구의 사정 등으로 인해 강력한 반대 의견이 있었다. 결국 지조를 4%에서 3.3%로 낮추고, 시가지 지조는 5%로 하며, 5년간의 시한 입법으로 타협했다. 1898년 12월 30일, 제국 의회에서 지조 조례 개정, 전답 지가 수정법이 모두 성립되었다.
- '''문관임용령''' 개정: 이전 오쿠마 내각에서 헌정당의 정치 임용이 고급 관료에까지 미쳐 정무가 혼란스러웠던 것을 받아, 장래에 일어날 수 있는 정당의 엽관 운동을 억제하고자 정치 임용은 친임관으로 한정했다.
- '''군부대신 현역 무관제''': 문관임용령과 마찬가지로, 군사는 특히 정당의 관여를 멀리하기 위해 대신까지 현역 무관으로 정했다.
- '''중의원 의원 선거법''' 개정: 대선거구 단기 무기명 투표제가 되었으며, 선거권의 조건을 직접 국세 15엔에서 10엔으로 인하하고, 피선거권의 납세 자격을 철폐했다. 1900년 3월 29일에 성립되었다.
- '''부현제''' 개정: 부현회 의원의 선거는 종전의 간접 선거에서 직접 국세 3엔 이상의 유권자에 의한 직접 선거로 고쳤다. 1899년 3월 6일에 성립되었다.
- '''치안경찰법''' 개정: 사회주의자에 대한 대책을 위해 개정되었다.
- '''홋카이도 구 토인 보호법''' 제정: 1899년에 제정되었다. 곤궁한 아이누의 보호를 구실로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누의 일본 사회로의 동화를 촉구했다.
- '''북청 사건'''(의화단 운동) 진압: 1900년, 의화단에 의한 베이징의 각국 공사관에 대한 무력 공격을 받아, 6월 15일 육군 파병을 각의 결정하였다. 제국 육군은 연합군의 중축을 차지하며, 8월 14일, 베이징을 평정했다.
5. 내각의 구성
후작
육군원수

자작

후작
해군원수

백작

자작
육군대장


귀족원의원

백작
해군대장


자작